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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의 재발견(펌글) /윤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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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3-03-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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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의 재발견으로 미의식의 회복을

-『창비어린이』 여름호 특집 ‘동시와 어린이’를 읽고


김종헌
金鐘憲 동시인, 『쪽배』 동인, 『아동문학평론』 기획위원, 대구대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경북대 및 동 대학원과 대구대 대학원(박사과정) 수료하고 2000년 가을에 『아동문학평론』동시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논문으로 「해방기 동시의 담론 연구」 등이 있다.


두 가지 문제제기


『창비어린이』가 창간 4주년을 기념해 ‘동시와 어린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오늘의 동시 문단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을 통해서 창작과 교육의 새 길을 찾고자 하는 기획으로 보인다. 사실 동시의 시적 수준에 대한 논란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07년 봄,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2007 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위원 좌담’을 열었고, 2006년에도 같은 잡지에서 ‘평론가들이 진단한 한국동시의 현주소’라는 주제로 동시의 경향과 수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런 토론과 평론에서 한결같이 나온 이야기는 신인의 실험성 부족과 기성시인의 안일한 창작 태도 등이다. 그러나 이번 『창비어린이』의 심포지엄에서 동시의 창작뿐만 아니라 비평, 나아가서 동시 교육의 문제까지 함께 거론된 점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동시의 창작과 비평 그리고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늘의 동시를 이해하는 데 참으로 적절하고 또 중요한 주제라 생각한다.

김이구는 「해묵은 동시를 던져버리자」에서 최근 발표되는 동시의 시적 완성도가 낮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원인으로 시인들의 “해묵은 관습”을 근본적인 문제라 지적하였다. 대화체나 독백체의 유행, 희화적 접근으로 인해 겉도는 시적 전개 등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그는 동시인의 “해묵은 관습”이 아직도 그대로 존재하는 이유를 “어린이 존재를 제한적인 인격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동시단은 “시적 모험”이 없으며, 시인 스스로 “자기 시를 보는 비평적 시야”가 없고 더욱이 “비평”마저 희미하다는 지적이다. 한편 정정순은 아동문학을 문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아동교육학’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즉 동시를 문학으로 감상하도록 하는 교육이 아니라 언어(국어) 교육의 텍스트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론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이처럼 동시는 그 수준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동심’에 대한 자의적 기준과 판단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필자는 동심의 개념과 동시가 지니는 문학적인 특성을 객관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동시에 붙어 있는 접두어 같은 ‘동’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한 이후에 ‘시’에 대한 문학적 가치를 살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두 가지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아동과 동심에 대한 개념이다. 일반적인 동심과 문학적 차원에서의 동심을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에 대한 문학적 가치를 살피는 것으로 동요와 동시의 구분을 통해서 그 장르적 개념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동심의 인식과 동시의 함수


아동문학에서 ‘동심’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에서 의미하는 연령과 발달심리를 전제로 하는 아동의 심리가 아니다. 동심은 세계를 읽을 수 있는, 또 무엇을 말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구분하는 하나의 담론이다. 담론은 서로서로를 구분지어 주는 대립관계를 통해 비로소 각자의 의미를 얻게 되는 언술의 체계로,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눈’인 것이다. 따라서 담론으로서의 동심은 교육적 대상으로서의 아동을 전제로 한 착한 동심만을 받아들여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동심의 허상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여성문학과 노동문학이 그 독자의 수준을 고려하는 창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하는 것처럼 아동문학도 독자의 수준과 ‘동심’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동시는 사회학적 개념인 아동을 그 대상으로 파악하고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수준’에만 한정되고 있다. 그래서 동시인 스스로 아동의 수준을 설정하고 또 식상한 소재로 같은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동심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순수성과 아동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모든 동심이 동질적이며 모두에게 공유되는 ‘휴머니즘적 동심’이다. 이 동심은 흔히 이야기하는 동심천사주의 내지는 동심제일주의와 비슷한 개념인데, 영원불변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동질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휴머니즘적 동심은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경험 등에 의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갈등을 무시하고 있다. 시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발제자의 말대로 어린이를 제한적인 인격으로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작가는 대상을 시적 언어로 자유롭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어린이들이 향유할 수 있는 수준과 향유했으면 하는 시인의 욕망을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창작 태도는 많은 동시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비슷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문학에서의 동심은 문명에 지친 인간을 끌어안고 인간과 상호관계성 속에서 상생의 기능을 하는 자연이며 순수, 즉 담론으로서의 동심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본질이며 근원적인 고향인 것이다. 따라서 담론으로서의 동심을 바탕으로 할 때 동시의 미적 완성도가 높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가 그 대상이 아동이라고 해서 아동의 정서적․지적 수준을 고려하다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들이 읽고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일상의 현실을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여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가 되고 만다. 이는 시적 수준의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한편 동요와 동시를 구분하는 것은 동시의 시적 완성도에 대한 논의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미 1930년대부터 동시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동요인지 동시인지도 구분하지 않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일반시의 경우와 달리 동시는 아직도 동요가사(노랫말)와 동시의 구분이 모호한 가운데 외형률과 언어의 유희적 특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동요는 형식적인 면에서 외형률에 의한 분절과 대구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낭송하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동요는 친숙한 가운데 쉽게 불려야 하기 때문에 동시처럼 이미지, 상징, 은유가 깊이 있게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에 비해서 동시는 내재율을 가진 자유시로서 일상적인 현실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여 시적 현실을 표현한다. 그래서 동시는 뚜렷한 이미지, 비유와 내재율 등 시 정신을 가진 문학작품이며, 언어로써 미적 표현을 하는 언어 예술이다. 다만 동시인 까닭에 앞에서 논의한 동심을 바탕으로 할 뿐이다. 따라서 동요는 동시문학과 구분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창작도 비평도 이루어져야 한다.


엇갈리는 평론


김이구의 지적대로 최근 발표되는 동시가 낡은 소재와 발상으로 비슷비슷한 시적 모티브와 시적 상황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창작 태도에 대한 그의 지적과 우려에 공감한다. 그러나 동시의 시적 완성도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심포지엄의 종합토론에서도 이안과 토론이 있었지만, 서로의 입장만 확인하는 정도에 그친듯해서 몇 가지 사실을 다시 짚어 보고자 한다. 이는 지금까지 ‘아동’과 ‘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지 않고 늘 가지 끝에 피어난 꽃의 모양과 색깔만 보고 그것을 평가한 오류를 재현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시를 읽는 독자의 감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일한 잣대를 다르게 적용하는 것은 비평의 문제이다.

발제자가 인용한 신현림의 「초코파이 자전거」와 박소명의 「호수에서」는 둘 다 의태어를 중심으로 시적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동시에 대한 발제자의 평가 기준이 애매하다. 한 동시는 그 소재를, 또 다른 동시는 의태어의 활용을 기준으로 동시를 평하고 있다. 즉 「초코파이 자전거」에 대해서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로 우리말의 맛을 살”렸고 “아이의 감정을 해방시키는 활달함이 돋보인다”는 평을 하고, 반면에 「호수에서」는 “되풀이 되는 소재”로 개성이 없다고 하였다. 발제자의 이러한 평은 기존의 동시와 다른 발상법과 참신성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에 나타난 성급함이라 생각된다.

시는 시어를 통해서 일상을 함축해 놓고 있기 때문에 시적 상황 속에서 상상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적 근거가 없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문제가 된다. 동시 「초코파이 자전거」는 초코파이로 만든 자전거 모양의 데코레이션 케이크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초코파이 자전거’가 분명한 시적 상황을 그려내지 못한 가운데 바람, 다람쥐, 까치, 고양이가 먹어서 폭삭 주저앉았다는 발상은 시적 전개상에 문제가 있다. 또 앞서 논의한 동심 담론을 기준으로 이 동시를 살펴보면 그렇게 많이 사용된 의태어가 주는 시적 효과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편 박소명의 「호수에서」는 그 소재가 “호수-오리” 등 진부한 면이 있으나 디지털 문명의 속도에 매몰된 요즘 우리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 즉 문명의 발달 속에 인간적인 정서를 추구하는 동심이 있다. 다만 이 동시는 4연에서 주제를 너무나 쉽게 노출시켰다는 점이 아쉽다.


으르렁 드르렁

드르르르 푸우-


아버지 콧속에서

사자 한 마리

울부짖고 있다.


생쥐처럼 살금살금

양말을 벗겨 드렸다.

-김은영 「잠자는 사자」 전문


인용 동시는 아버지의 고단함을 이해하는 시적화자의 성숙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정서는 3연의 “살금살금 / 양말을 벗겨 드렸다.”에 모아져 있다. 그러나 1연의 의성어가 전체적인 시상을 끌고 가는 힘이 약하다. 피곤에 지쳐 곤하게 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콧속에서 사자 한 마리”가 울부짖는 의성어로 함축하기에는 시적전개가 미흡하다. 이는 피곤한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잠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희화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2연의 “울부짖고 있다.”와 호응도 이루지 못한다. 즉 아버지의 곤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시적 근거가 미약하며 사자와 생쥐의 비유가 화자의 안타까움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울림이 없다. 이것을 발제자의 말처럼 “아이의 일상을 잡아내면서 아이의 삶을 그 자체로 유쾌하게 드러낸다”고 보기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동시는 1연에서 의성어보다는 피곤에 지친 아버지의 모습을 좀 더 주관적으로 묘사하여 시적화자의 정서를 표현했으면 주제가 더 살아났을 것이다. 즉 시적 주체의 성숙된 태도를 뒷받침 해 주는 상황의 전개가 아쉽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이 나약한 동심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지는 앞서 있는 반면에 동심에 대한 인식은 제한적이어서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까만 살갗

까만 살갗 아래 하얀 살덩이처럼 뭉쳐진

하얀 밥덩이

하얀 밥덩이 속에 뼈처럼 박혀 있는

단무지, 오이, 햄, 어묵, 달걀부침

모두 한 덩어리로 뭉쳐진 고소한 맛 덩어리

그 맛 덩어리 하나 날름 집어 입에 쏙 넣는다.

-권오삼, 「김밥 먹기」 전문


이 동시는 김밥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와 김밥을 먹는 어린이의 모습이 재미있게 나타나 있다. 또 앞 행의 마지막 시어를 연속적으로 이어감으로써 동시의 경쾌한 리듬감도 살려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 김이구는 “어린이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시인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아이의 눈으로 보고 아이의 마음을 담고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시인의 의도가 편편이 배어 있다”며 “김밥을 너무나 맛있게 날름 집어 먹는 아이의 모습”이 손에 잡힌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권오삼의 말대로 “어떡하면 어린이들이 좋아할까”(「시인의 말」)만을 고민한, 즉 동심의 제한적 인식이 초래한 재미와 인기 중심의 동시일 뿐이다. 또 기존의 진부한 표현을 벗어나 발상의 참신함과 새로운 표현에 집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하얀 밥덩이”와 “단무지, 오이, 햄, 어묵, 달걀부침” 등이 한 덩어리로 뭉쳐지는 역동성이 없으며 다양한 정서를 함유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 맛 덩어리 하나 날름 집어 입에 쏙 넣는” 즐거운 화자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적 대상을 단순 묘사하는 데 그치고 말았는데도 이것을 “우울하거나 불쾌할 만한 상황도 장난스럽고 명랑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비평 한 것은 아무래도 평자의 주관성이 지나치다고 본다. 동심에 대한 제한적 인식이 창작의 문제인 만큼 비평은 이를 바로 잡을 수 있어야 새로운 동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습적인 창작 풍토”를 벗어나 “해묵은 동시를 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발제자의 문제제기에서 동시 문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심포지엄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기대와 우려


동시의 시적 수준을 논의할 때 흔히 독자의 연령을 높여 잡거나 주제에 대한 무게에 중점을 두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독자의 연령을 높이면 시적 전개가 좀 더 자유로울 것이라는 발상인 듯하다. 한국문협에서도 ‘아동문학분과’ 외에 ‘청소년문학분과’를 따로 두고 있다. 이 같은 연령에 따른 문학의 분류는 지금까지 논의한 동심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문제라 보인다. 시적 완성도와 독자의 연령을 높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동시의 수준에 대한 또다른 오류는 시적 수준이 그 주제의 무게와 비례한다는 생각이다. 즉 서경이나 서정보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리얼리즘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주제가 좋다고 해서 표현미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즉 아이디어와 주제가 의미 있고 참신하다해서 수준 있는 동시로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감동과 울림이 없이 강한 주제 의식만 부각되면, 문학이 예술의 영역을 벗어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적 고민과 표현미가 있어야 한다. 동시의 사회적 상상력은 현실에서 아동의 정체성을 찾고 그 속에서 문명과 아동, 자연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시적대응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문제도 함께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개인적으로 남는다.

한편 최근에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비룡소 2005), 최명란의 『하늘天 따地』(비룡소 2007), 안도현의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2007) 등 일반 시인의 동시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동시 발표를 “의미 있는 도전”이라 보는 시각도 약간 염려가 된다. 이들 동시에 나타난 말놀이가 요즘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의문이다. 지나친 의성어와 의태어 사용, 음가의 유사성을 이용한 연상 등의 방법은 옛날 아이들의 놀이에 따라다니던 생활 동요 같은 느낌을 줄 뿐이라는 생각이다.


호호호호 호박꽃

호박꽃을 따버리면

애애애애 애호박

애호박이 안 열려

호호호호 호박전

호박전을 못 먹어

-안도현 「호박꽃」 전문


이 동시에서 “호호호호”나 “애애애애” 등 음가의 유사성을 이용한 소리의 반복은 익살스러움과 단순함으로 어린이들의 심성에 다가서고 있다. 특히 4+3 음수율과 2음보의 율격은 천진난만한 동심과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작이 연상될 정도로 경쾌하다. 그러나 이러한 율격은 이미 일제강점기 말에 윤복진에 의해서 발견된 것으로 참신함을 잃고 있다. 이는 해방이후 율격 중심의 동요를 벗어나서 자유 동시 형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부분이다. 이는 앞에서 제기한 동시와 동요를 구분한 가운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이와 비슷한 발상은 안도현의 「풋살구」에서도 느낄 수 있다. 단순 연상을 통한 말놀이식의 이런 동시는 과거 구전되던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다’와 같은 놀이 동요의 발상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단지 어린이들이 읽어야 하니까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은 짚어봐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말놀이는 유아기에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또 교육현장에서 말의 재미와 활용을 가르치기 위해서 동음반복과 음가의 유사성이 있는 말놀이 등을 활용하고 있다. 이는 정정순이 발표한 「동시교육, 이렇게 하자」에서 제기된 문제와도 같다. 즉 초등 1학년까지 국어교육의 목표가 말의 재미를 통한 언어 활용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재용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최근 말놀이 동시라는 이름으로 일반 시인들이 이 같은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아동(또는 동심)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동시에 대한 편견에서 빚어진 결과가 아닌가 한다.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러한 동시에 대한 비평이 호들갑스럽다는 느낌이다. 박덕규는 안도현의 동시집 해설에서 위의 시 「호박꽃」을 “남의 손으로 호박꽃이 따질 때의 꽃의 수줍은 느낌과 애호박을 못 열게 되어 억울한 심정, 그리고 호박 수확을 못하게 되어도 자연스런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화해로운 감정들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런 해설은 평론가의 지나친 상상력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시는 시적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시적 근거가 반드시 시 속에 시어로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동시는 이 함축적인 미의 수준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동시는 동요와 장르의 구분을 분명히 한 가운데 그 평가 이루어져야 한다.

몇 편의 작품으로 이들 시집 전체를 논하는 듯해서 일반화의 오류가 있지만, “사물의 말과 뜻을 함께 깨치는” 유아기의 학습용 동요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와 같은 말놀이 동시에 대한 평은 작품 중심이라기보다는 작가 중심으로 혹은 아동문학의 미흡한 수준을 보편화시켜 놓고 다른 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대로 수용한 것 아닌가 싶다. 동시를 쓰는 일반 시인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첫째, 시와 동시의 구분을 없앨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다음은 동시인들의 안일한 창작 태도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포지엄의 종합토론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일반 시인의 동시에 대한 시적 완성도에 대한 비평은 좀 더 객관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유명세를 이용한 출판사의 기획과 신자유주의 질서에 동시 문단이 농락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