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 나의 청춘(이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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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석구 작성일 13-03-31 21:10본문
글쓴이 : 이원수 ( ) 날짜 : 05-09-17 16:26 조회 : 1811
▷고독을 즐기며
엄지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읍내 저자 다 보시고
신작로에 오시지.
둘째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아기 신발 사 가지고
고개 넘어 오시지.
내가 쓴 동요 〈어디만큼 오시나〉의 첫머리이다.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하나하나 붙들고 자문자답하는, 이 엄마 기다리는 노래는, 내 어릴 적 산에 나무를 하러 간 어머니를 누나와 함께 웅얼대던 노래였던 것도 같다.
딸만 여섯을 낳은 어머니는 독자인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지만 여자들 속에서 자라며 나는 여자와 같은 성격까지 받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줍을 타며 사교성 없는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라 적잖이 고독을 즐겼다. 게다가 허약한 체질이었다.
외롭고 약한 자의 최고의 지주는 정의에 대한 신념이다. 비굴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 길은 나 자신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과, 항상 사회 정의의 밝은 눈으로 매사에 임하는 일이라 믿고 있었다. 소년 시절에 잡지에 발표된 동요 〈고향의 봄〉은 곧 작곡이 되어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고, 운동회 때 보면 여학생들이 유희라는 이름의 춤까지 추곤 했는데, 그런 것이 마음에 즐겁기는 했지만 남에게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 동요를 쓴 1935년은 우리 나라에 신동요가 나오기 시작하여 2, 3년밖에 안 된 때요, 아동 문학의 초기라 할 때였다. 그랬던만치 선배의 작품이라 하여 보고 배울 것이 희소하였고, 기껏해서 외국의 동요나 보고 생각할 정도였다.
1929년에 발표한 〈가시는 누나〉는 그 즈음 나의 동요 경향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누나를 바래 주러
뱃머리에 나왔더니
흐렸던 하늘이
그만 비를 뿌리시네.
두 달 만에 한 번 겨우 다니러 왔다가
단 이틀을 못 쉬고 가야만 하는 건지.
편지마다 고향집이 그립다던 누나건만
처음 갈 땐 배에서도 울던 누나건만
점원이 된 지 이제 두 달
내 손에 과자 봉지 쥐어 주며
안 나오는 웃음으로
잘 있거라는 그 목소리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세상에 누구보다
고마운 우리 누라.
씩씩한 우리 누나.
옷보퉁이 옆에 끼고
비오는 갑판 위에 우두커니 선 누나,
그 눈에도, 그 눈에도
필시 비는 오시리라.
바다에 비는 부슬부슬
비 속에 배도 멀어져 안 뵈건만
나는 부두에 혼자 서서
비 오는 바다만 보고 있다.
가난과 핍박의 생활 속에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의 감정,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노래한 〈헌 모자〉〈이삿길〉〈찔레꽃〉〈보오야 넨네요〉등 그 즈음의 나의 동요들은 소리 높여 노래할 동요가 아니라 대개가 자유율의 시였다.
1936년의 작품 〈나무 간 언니〉도 역시 같은 유의 빈한의 생활이 드러나 있다.
이 추운 날도
언니는 지게 지고 나무 가셨다.
호오호 손 불면서
나무 가셨다.
솔밭 부는 바람은 위잉위잉……
골짜기 개울은 꽁꽁 얼어서
춥단 말도 안 나오는
저기 저 산.
해야,
번쩍이는 해야,
좀더 내려와서
나무하는 울 언니
쬐어나 주렴.
농촌 아동, 소도시 아동들의 생활을 내 생활로 삼고 시를 써 온 나는 어디까지나 시골 동시인이었다. 그런만치 잘 다듬어지고 미끈한 작품은 쓰지 못한 것 같다.
처음 취직을 경남 함안의 금융조합에 한 나는 거기서 농민들의 생활을 직시하고 일제하의 농민의 빈궁상에 마음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춘궁에 대부금 이자를 받으러 가는 일이 많았다. 여항산 높은 재를 넘어 산골 마을에 가면 그 궁해 빠진 사람들의 모습들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여항산의 높은 고갯길을 넘으면 먼 산줄기에서 불어 오는 솔바람 소리가 비가처럼 들리고, 고개 너머 산골짝에 까마득히 게딱지같은 집들이 보인다. 낮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 산을 넘어다니며, 나는 농촌 아이들의 노래를 생각했었다. 나는 그런 농촌 아동들을 위해 즐겁고 유쾌한 기를 써서 그들을 기쁘게 해 줄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들과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 바른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1936년에 발표한 〈보오야 넨네요〉는 역시 슬픈 시였다.
저녁이면 성둑엔
아기 업고 나와서
"보오야 넨네요."
"보오야 넨네요."
아기는 일본 아기
칭얼칭얼 우남이.
해질녘엔 여기 와서
"보오야 넨네요."
귀남아
귀남아,
너희 집은 어디냐?
저 산 너머 마을이냐?
엄마 아빠 다 있니?
나무 나무 늘어선 서산 머리는
새빨간 새빨간 저녁놀 빛.
귀남아, 네 눈에도 저녁놀 빛.
일본 사람 집에서 아기를 보아 주고 사는 소녀들이 많았다. '보오야 넨네요'란 -'아가야 자장 자장'이란 뜻이다.
친구들과 문학서클을 만들었다가 경찰에 피검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나의 동시의 세게는 이런 길로 굳어져 갔고, 해방 이후로 쓰기 시작한 소년 소설과 동화 역시 서민 아동의 세계만이 그 중심이 되었다.
1947년에 쓰기 시작하여 잡지 《아동 구락부》에 연재한 소년 소설 〈5월의 노래〉는 일제하에서 일본 정치에 시달리며 저항하는 아동을 그린 것으로, 이 작품의 구상과 소재는 내 어린 시절과 영어(囹圄) 생활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 어둡던 시절의, 그 어둠을 직사하게 느끼며, 곤궁을 몸소 겪으며 살아온 나의 청소년 시대는 한마디로 말해서 고독한 시대였다. 나는 그 고독을 즐기며 약하나마 굽히지 않고 살아가리라 결심을 더욱 굳혔다.
▷불의와의 싸움에서 사랑의 노래로
1945년 해방 직후 나는 서울에 와서 교사가 되었다.
해방의 기쁨은 또 다른 고민을 우리들에게 안겨 주어, 정치적 혼란과 국토의 양단, 사상적 상극으로 이리 밀고 저리 밀리는 신세였지만, 나에게는 그 때까지의 시작(詩作) 외에 산문을 쓰기 시작한 전기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 장군처럼 사방에서 큰소리들을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형편을 보고 동시를 쓰는 나의 마음은 울분과 탄식에 젖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시 〈너를 부른다〉는 탄식조의 동시였다.
나뭇잎이 손짓하며
너를 부른다.
운동장 느티나무
가지마다 푸른 잎새,
바람에 한들한들
너를 부른다.
꽃이파리 꽃잎마다
너를 부른다.
울타리엔 찔레꽃
향기마저 피우며
바람에 하늘하늘
너를 부른다.
순희야,
순희야,
양담배 양사탕
상자에 담아 들고
학교엔 안 나오고
행길로만 도느냐.
우리도 목메이며
너를 부른다.
이런 동시로써 내 가슴이 후련해질 까닭이 없었다.
동화를 쓰자. 소설을 쓰자. 그런 것으로 내 심중의 생각을 토로해 보자는 속셈이다.
쫓겨가는 외인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외인에게는 허리 굽혀 환영을 한다. 외인의 것이면 물자건 풍습이건 즐겨 받는다. -이런 세상이 싫었다.
장편 동화 〈숲 속 나라〉는 나의 산문 작품으로 처음의 것이요, 그건 어린이들의 그린 것이었다. 자유와 사랑과 자주의 나라, 외세를 배격하고 참된 독립의 나라를 환상적인 이야기로써 만든 동화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내 심중에 바라는 사랑과 자유의 나라를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이와 거의 같은 때에 쓴 〈5월의 노래〉도 순정과 서정적인 이야기로 일제하의 어린 시절의 생활을 소재로 한 항일성의 소설이었다.
6·25의 처참한 전쟁을 겪고, 내 문학의 독자들은 더 한층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피난지 대구에서 아동 문예 월간 잡지 《소년 세계》를 창간하여 몇 해 동안 거기에 정열을 쏟은 것도, 전후의 소년들을 사랑한 내 마음 때문이었다.
거칠어지고 이기적이기만 한 전후의 사회, 그 속에서 시달리고 물들어 가는 어린 생명들. 그들마저 흉해지면 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노파심이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
50년대의 상업주의는 아동 문학에도 스며들어 와서 문학에서 아동들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통속 소년 소설의 범람도 거기서 시작되었고, 그 탁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소수 작가들은 불온 작가라는 모함까지 받아야 했었다.
통속의 표면은 흔히 동심주의, 천사주의, 교육주의였다.
이 불순한 아동 문학 때문에 피해도 많았고 설움도 많았지만 그런 피해나 설움쯤으로 나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장편 〈아이들의 호수〉〈메아리 소년〉〈민들레의 노래〉들은 모두가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을 다룬 작품들이었다. 전쟁은 어린아이들에게 신나는 일이기도 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전쟁놀이를 즐기고 무기의 장난감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전쟁의 상처는 누구보다도 크고 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1960년이 지나서부터 내 시의 세계나 동화에 많은 변화가 온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좀 자리를 멀리하고 사적인 애정 세계에 가까이하게 된 것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숨길 수 없으나 작품에 드러내어 다루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후퇴나 타락일지 모른다. 하지만 젊은 아동 문학인들 가운데도 썩은 것을 썩지 않았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고, 그러는 걸 알면서도 점잖이 보기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에서, 늙어서까지 흥분하며 소리치는 것이 쑥스럽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을 지나면
우우 부는 솔바람도
그 날 그 소리.
조잘대는 개울물도
그 날 그 소리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을 지나면
소곤대던 영이 말이 귀에 들릴 듯,
나긋한 영이 손이 불쑥 잡힐 듯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은 멀어도
영이가 생각나면
찾아가는 곳,
배고프면 나 혼자
지나 보는 곳.
-〈다릿목〉
이런 애정의 노래는 1960년 이후의 나의 시의 한 유형이 되고 만다.
해는 먼먼 저 세상에 있다.
빛만 오는
헤아릴 수 없이 먼 나라
지금 내게 와서 닿는
이 따순 입김은
거기서 오는 마음만의 손길.
어루만지고
때로는 태울 듯 홧홧 다는…….
멀리 있어 보고픈 아이,
가 버려서 슬픈 어머니,
아득한 먼 곳에서
애타게 더듬어 나를 만져 주시는가.
따가운 볕에
얼굴 내맡기고
마음 흐뭇다 못해 눈이
젖어 온다.
-〈햇볕〉
애정의 세계를 따스히 안고 싶은 나의 마음을 속일 수가 없다.
나의 작품집 《시가 있는 작품집》에 들어 있는 시나 동화, 소설들은 거의 모두 애정이 그 주제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의 나의 생각이 아주 없어졌거나 달라진 것은 아닌 성싶다. 근작 장편 동화 〈잔디숲 속의 이쁜이〉는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다. 획일적이요 전체주의적인 생활을 싫어하고 자유와 사랑을 누릴 생활을 위해 도망친 이쁜이의 생활을 그려보았다.
그런만치 그 작품에는 연애가 있고 결혼이 있어, 동화로서는 좀 색다른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작품 세계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런 길에 있을 것 같다. 그런 것을 남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남에게 지지도 않을 것을 은근히 믿고 있는 것이다.
(1974년 2월 월간 문학》)
▷고독을 즐기며
엄지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읍내 저자 다 보시고
신작로에 오시지.
둘째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아기 신발 사 가지고
고개 넘어 오시지.
내가 쓴 동요 〈어디만큼 오시나〉의 첫머리이다.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하나하나 붙들고 자문자답하는, 이 엄마 기다리는 노래는, 내 어릴 적 산에 나무를 하러 간 어머니를 누나와 함께 웅얼대던 노래였던 것도 같다.
딸만 여섯을 낳은 어머니는 독자인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지만 여자들 속에서 자라며 나는 여자와 같은 성격까지 받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줍을 타며 사교성 없는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라 적잖이 고독을 즐겼다. 게다가 허약한 체질이었다.
외롭고 약한 자의 최고의 지주는 정의에 대한 신념이다. 비굴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 길은 나 자신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과, 항상 사회 정의의 밝은 눈으로 매사에 임하는 일이라 믿고 있었다. 소년 시절에 잡지에 발표된 동요 〈고향의 봄〉은 곧 작곡이 되어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고, 운동회 때 보면 여학생들이 유희라는 이름의 춤까지 추곤 했는데, 그런 것이 마음에 즐겁기는 했지만 남에게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 동요를 쓴 1935년은 우리 나라에 신동요가 나오기 시작하여 2, 3년밖에 안 된 때요, 아동 문학의 초기라 할 때였다. 그랬던만치 선배의 작품이라 하여 보고 배울 것이 희소하였고, 기껏해서 외국의 동요나 보고 생각할 정도였다.
1929년에 발표한 〈가시는 누나〉는 그 즈음 나의 동요 경향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누나를 바래 주러
뱃머리에 나왔더니
흐렸던 하늘이
그만 비를 뿌리시네.
두 달 만에 한 번 겨우 다니러 왔다가
단 이틀을 못 쉬고 가야만 하는 건지.
편지마다 고향집이 그립다던 누나건만
처음 갈 땐 배에서도 울던 누나건만
점원이 된 지 이제 두 달
내 손에 과자 봉지 쥐어 주며
안 나오는 웃음으로
잘 있거라는 그 목소리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세상에 누구보다
고마운 우리 누라.
씩씩한 우리 누나.
옷보퉁이 옆에 끼고
비오는 갑판 위에 우두커니 선 누나,
그 눈에도, 그 눈에도
필시 비는 오시리라.
바다에 비는 부슬부슬
비 속에 배도 멀어져 안 뵈건만
나는 부두에 혼자 서서
비 오는 바다만 보고 있다.
가난과 핍박의 생활 속에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의 감정,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노래한 〈헌 모자〉〈이삿길〉〈찔레꽃〉〈보오야 넨네요〉등 그 즈음의 나의 동요들은 소리 높여 노래할 동요가 아니라 대개가 자유율의 시였다.
1936년의 작품 〈나무 간 언니〉도 역시 같은 유의 빈한의 생활이 드러나 있다.
이 추운 날도
언니는 지게 지고 나무 가셨다.
호오호 손 불면서
나무 가셨다.
솔밭 부는 바람은 위잉위잉……
골짜기 개울은 꽁꽁 얼어서
춥단 말도 안 나오는
저기 저 산.
해야,
번쩍이는 해야,
좀더 내려와서
나무하는 울 언니
쬐어나 주렴.
농촌 아동, 소도시 아동들의 생활을 내 생활로 삼고 시를 써 온 나는 어디까지나 시골 동시인이었다. 그런만치 잘 다듬어지고 미끈한 작품은 쓰지 못한 것 같다.
처음 취직을 경남 함안의 금융조합에 한 나는 거기서 농민들의 생활을 직시하고 일제하의 농민의 빈궁상에 마음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춘궁에 대부금 이자를 받으러 가는 일이 많았다. 여항산 높은 재를 넘어 산골 마을에 가면 그 궁해 빠진 사람들의 모습들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여항산의 높은 고갯길을 넘으면 먼 산줄기에서 불어 오는 솔바람 소리가 비가처럼 들리고, 고개 너머 산골짝에 까마득히 게딱지같은 집들이 보인다. 낮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 산을 넘어다니며, 나는 농촌 아이들의 노래를 생각했었다. 나는 그런 농촌 아동들을 위해 즐겁고 유쾌한 기를 써서 그들을 기쁘게 해 줄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들과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 바른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1936년에 발표한 〈보오야 넨네요〉는 역시 슬픈 시였다.
저녁이면 성둑엔
아기 업고 나와서
"보오야 넨네요."
"보오야 넨네요."
아기는 일본 아기
칭얼칭얼 우남이.
해질녘엔 여기 와서
"보오야 넨네요."
귀남아
귀남아,
너희 집은 어디냐?
저 산 너머 마을이냐?
엄마 아빠 다 있니?
나무 나무 늘어선 서산 머리는
새빨간 새빨간 저녁놀 빛.
귀남아, 네 눈에도 저녁놀 빛.
일본 사람 집에서 아기를 보아 주고 사는 소녀들이 많았다. '보오야 넨네요'란 -'아가야 자장 자장'이란 뜻이다.
친구들과 문학서클을 만들었다가 경찰에 피검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나의 동시의 세게는 이런 길로 굳어져 갔고, 해방 이후로 쓰기 시작한 소년 소설과 동화 역시 서민 아동의 세계만이 그 중심이 되었다.
1947년에 쓰기 시작하여 잡지 《아동 구락부》에 연재한 소년 소설 〈5월의 노래〉는 일제하에서 일본 정치에 시달리며 저항하는 아동을 그린 것으로, 이 작품의 구상과 소재는 내 어린 시절과 영어(囹圄) 생활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 어둡던 시절의, 그 어둠을 직사하게 느끼며, 곤궁을 몸소 겪으며 살아온 나의 청소년 시대는 한마디로 말해서 고독한 시대였다. 나는 그 고독을 즐기며 약하나마 굽히지 않고 살아가리라 결심을 더욱 굳혔다.
▷불의와의 싸움에서 사랑의 노래로
1945년 해방 직후 나는 서울에 와서 교사가 되었다.
해방의 기쁨은 또 다른 고민을 우리들에게 안겨 주어, 정치적 혼란과 국토의 양단, 사상적 상극으로 이리 밀고 저리 밀리는 신세였지만, 나에게는 그 때까지의 시작(詩作) 외에 산문을 쓰기 시작한 전기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 장군처럼 사방에서 큰소리들을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형편을 보고 동시를 쓰는 나의 마음은 울분과 탄식에 젖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시 〈너를 부른다〉는 탄식조의 동시였다.
나뭇잎이 손짓하며
너를 부른다.
운동장 느티나무
가지마다 푸른 잎새,
바람에 한들한들
너를 부른다.
꽃이파리 꽃잎마다
너를 부른다.
울타리엔 찔레꽃
향기마저 피우며
바람에 하늘하늘
너를 부른다.
순희야,
순희야,
양담배 양사탕
상자에 담아 들고
학교엔 안 나오고
행길로만 도느냐.
우리도 목메이며
너를 부른다.
이런 동시로써 내 가슴이 후련해질 까닭이 없었다.
동화를 쓰자. 소설을 쓰자. 그런 것으로 내 심중의 생각을 토로해 보자는 속셈이다.
쫓겨가는 외인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외인에게는 허리 굽혀 환영을 한다. 외인의 것이면 물자건 풍습이건 즐겨 받는다. -이런 세상이 싫었다.
장편 동화 〈숲 속 나라〉는 나의 산문 작품으로 처음의 것이요, 그건 어린이들의 그린 것이었다. 자유와 사랑과 자주의 나라, 외세를 배격하고 참된 독립의 나라를 환상적인 이야기로써 만든 동화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내 심중에 바라는 사랑과 자유의 나라를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이와 거의 같은 때에 쓴 〈5월의 노래〉도 순정과 서정적인 이야기로 일제하의 어린 시절의 생활을 소재로 한 항일성의 소설이었다.
6·25의 처참한 전쟁을 겪고, 내 문학의 독자들은 더 한층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피난지 대구에서 아동 문예 월간 잡지 《소년 세계》를 창간하여 몇 해 동안 거기에 정열을 쏟은 것도, 전후의 소년들을 사랑한 내 마음 때문이었다.
거칠어지고 이기적이기만 한 전후의 사회, 그 속에서 시달리고 물들어 가는 어린 생명들. 그들마저 흉해지면 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노파심이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
50년대의 상업주의는 아동 문학에도 스며들어 와서 문학에서 아동들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통속 소년 소설의 범람도 거기서 시작되었고, 그 탁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소수 작가들은 불온 작가라는 모함까지 받아야 했었다.
통속의 표면은 흔히 동심주의, 천사주의, 교육주의였다.
이 불순한 아동 문학 때문에 피해도 많았고 설움도 많았지만 그런 피해나 설움쯤으로 나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장편 〈아이들의 호수〉〈메아리 소년〉〈민들레의 노래〉들은 모두가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을 다룬 작품들이었다. 전쟁은 어린아이들에게 신나는 일이기도 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전쟁놀이를 즐기고 무기의 장난감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전쟁의 상처는 누구보다도 크고 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1960년이 지나서부터 내 시의 세계나 동화에 많은 변화가 온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좀 자리를 멀리하고 사적인 애정 세계에 가까이하게 된 것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숨길 수 없으나 작품에 드러내어 다루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후퇴나 타락일지 모른다. 하지만 젊은 아동 문학인들 가운데도 썩은 것을 썩지 않았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고, 그러는 걸 알면서도 점잖이 보기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에서, 늙어서까지 흥분하며 소리치는 것이 쑥스럽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을 지나면
우우 부는 솔바람도
그 날 그 소리.
조잘대는 개울물도
그 날 그 소리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을 지나면
소곤대던 영이 말이 귀에 들릴 듯,
나긋한 영이 손이 불쑥 잡힐 듯
영이와 헤어지던
다릿목은 멀어도
영이가 생각나면
찾아가는 곳,
배고프면 나 혼자
지나 보는 곳.
-〈다릿목〉
이런 애정의 노래는 1960년 이후의 나의 시의 한 유형이 되고 만다.
해는 먼먼 저 세상에 있다.
빛만 오는
헤아릴 수 없이 먼 나라
지금 내게 와서 닿는
이 따순 입김은
거기서 오는 마음만의 손길.
어루만지고
때로는 태울 듯 홧홧 다는…….
멀리 있어 보고픈 아이,
가 버려서 슬픈 어머니,
아득한 먼 곳에서
애타게 더듬어 나를 만져 주시는가.
따가운 볕에
얼굴 내맡기고
마음 흐뭇다 못해 눈이
젖어 온다.
-〈햇볕〉
애정의 세계를 따스히 안고 싶은 나의 마음을 속일 수가 없다.
나의 작품집 《시가 있는 작품집》에 들어 있는 시나 동화, 소설들은 거의 모두 애정이 그 주제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의 나의 생각이 아주 없어졌거나 달라진 것은 아닌 성싶다. 근작 장편 동화 〈잔디숲 속의 이쁜이〉는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다. 획일적이요 전체주의적인 생활을 싫어하고 자유와 사랑을 누릴 생활을 위해 도망친 이쁜이의 생활을 그려보았다.
그런만치 그 작품에는 연애가 있고 결혼이 있어, 동화로서는 좀 색다른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작품 세계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런 길에 있을 것 같다. 그런 것을 남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남에게 지지도 않을 것을 은근히 믿고 있는 것이다.
(1974년 2월 월간 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