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천선생의<호박꽃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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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석구 작성일 13-03-31 21:00본문
글쓴이 : 어효선 ( 아동문학가) 날짜 : 05-09-17 22:50 조회 : 2195
1941년에 나온 강소천 동요 시집 <호박꽃 초롱>은 내 교과서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소천을 스승으로 여겨 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호박꽃 초롱>은 여섯쪽이 떨어져 나간 헌 책이다. 1951년, 서울 재탈환 이듬해엔가 선생을 알게 되었다. 월남한 분이 이 책을 가지고 있을 성싶지 않아, 자랑 겸 허실수로 물어보았다.
"남한에 왔더니 누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내게 주었어요. 그런데, 책이 몹시 헐었어요. 당신이 가진 것이 새책이거든....."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알아챘다. 소천이 깨끗한 책을 간수하고 싶어서 바꾸자는 눈치였다.
이 때 소천은, 마치 세사 장난하는 어린이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집 다구"
하고 중얼거리듯, 무척 순진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서너 달 전에 서울 글짓기회 연구회에 강사로 불려 나갔다. 소천 선생이 강의를 막 끝내고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초췌해 보였다.
적이나 하면 먼저 돌아갈 법한데, 끝까지 앉아 있었다. 사회자의 "... 특히 몸이 편찮으신 데도 나오셔서 좋은 말씀을 들려 주신 강소천 선생께 감사한다."는 말을 듣고, 몸이 아픈 줄 알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오는데, 어깨가 축처지고 걸음걸이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차라도 한 잔 하시자고 권했더니,
"바로 집으로 들어가야겠어."
하고 인사도 받지 않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가 버렸다. 섭섭하리만큼 매정스러웠다.
여느 때 같으면 그냥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글짓기 이야기를 또 꺼내고 기염을 토했을 텐데....
나와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는 , 숨을 거두기 27분전이었다.
이태 전에 위암을 수술받고, 경과가 좋아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얼굴이 퍽 좋아 보였다. 그 때 집도한 장기려 박사에게 고마운 분이라고 입에 침이 없이 치하했다.
"간이 조금 나쁘다고 약을 가르쳐 줬어. 이젠 살았어."
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퇴원하고는, 좀 쉴 줄 알았더니,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작품을 써 내고 방송국이다, 학교다, 정말 동분서주했다.
작품을 보거나, 방송을 들을 적마다
"이 분이 몸을 너무 부리는 군."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더니, 방송에도 안나오고, 작품도 그닥 보이지 않았다.
"위암이 재발했나?"
하고 궁금해 하던 차에 만나게 되었다. 건강이 어떠시냐고 물었다.
"일전에 뢴트겐 찍어 보았는데, 위는 깨끗하대."
하며, 아동 문학 이야기를 꺼냈다. 날이 어둔 뒤에 다방을 나와 저녁을 사주겠대서 충무로까지 갔다.
소천은 그날 책을 많이 샀다. 소천은 책을 많이 읽는다. 그의 서재를 보고 놀랐다.
내 노래에 <꽃밭에서>라는 게 있다. 피난 중에 대구에서 내던 <소년세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노래에 서로 모르던 사이인 권길상씨가 곡을 붙였다. 곡이 좋아서 한동안 불렀다. 이름없는 내 노래가 어린이들의 입에 오르니 적이 기뻤다.
소천은 처음 보는 나에게
"<꽃밭에서>가 많이 불리더군요. 그렇지만 2절은 동심이 아냐. 2절을 고쳤으면 좋을 것 같애."
라고 맞대 놓고 타박을 했다.
부끄럽고 고마왔다. 사람들은 대개 뒤에서 흉보기가 일쑤인데 맞대 놓고 일러 주니 얼마나 솔직한가. 그런거 하면, 내 노래 중의 <이른 봄>이 좋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칭찬하기란 흉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소천은 타박만 하는 게 아니라 칭찬할 줄도 아는 분이었다.
나는 첫 동요집 <봄이 오는 소리>를 엮으면서, <꽃밭에서> 2절을 고쳐 볼까하다가 뜻대로 안되어 빼고 말았다.
<새벗>에 동시 <꽃다발>을 실은 적 일이다. 다달이 한 사람의 동시를 너덧편씩 한 몫에 실었다. 하루는 소천이,
"다음엔 당신 차례니 작품을 보내시오."
하기에, 내깐엔 꼭 발표하고 싶었던 고아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일편의 동시를 보였다. 한 번 죽 훑어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왜 이렇게 슬픈 걸 쓰우."
하고, 책상서랍에 넣어 버렸다. 그 달엔 다른 분의 것이 실렸다. 소천은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엄격했다.
소천은 꽤 자상한 분이다. 내가 어린이 시간에 '동시감상'을 작가별로 한동안 방송한 일이 있다. 소천 편이 방송이 끝나자 전화가 왔다. 소천이었다. 내 방송을 녹음해 놓았다는 것이다.
동요 <닭> 외에 네 편을 골랐는데, 고향과 어머니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9월>이라는 동시는 이북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한 것이었다. 나는 이걸 읽고 해설하면서, 내가 소천이 되어 버려 목이 메었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소천이
"우리 집에 놀러 갑시다."
하고 앞장섰다. 일행이 서넛 되었었다. 소천은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곧 녹음기에 <동시 감상 강소천 편> 테잎으로 걸어 주었다. 나는 농조로,
"이 담에 내가 죽은 뒤에 내 목소리를 듣고 싶거든 강 선생 댁엘 찾아가라고 자식놈에게 일러 놓아야겠네."
했더니,
"시시한 거 지워 버리지, 하하하....."
하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소천은 술도 담배도 입에 안 댔다. 그렇지만, 술 먹는 사람하고 잘 어울리고, 술자리에선 술 먹은 사람보다도 잘 놀았다. 그러다가도 아동 문학 이야기를 꺼내서 입바른 사람의 핀잔을 받곤 했다.
작년인가 HLKA '학교방송' 10주년 기념 공개 방송에 불려 나갔다. 아나운서가 노래를 시켰다. 내 옆에 앉았던 소천은 수첩에다 뭘 부지런히 쓰고 나서,
"난 아걸 부를 테야, 가사 맞지?"
하며 내게 보였다.
내 노래 <꽃밭에서>의 첫절이었다. 그랬지만, 아나운서가 소천에게만은 당신의 노래 중에서 부르라고 해서, <태극기>를 불렀던 것 같다.
그 뒤에 내가 책 한 권을 엮게 되어 소천께 글을 부탁했더니, 써 가지고 나왔다.
"쓰기만 하고 읽어 보지 못했어."
하며 돋보기를 꺼내 썼다.
나는 "아니, 돋보기를?"
하고 놀라는 체했더니,
"왜, 나도 인젠 할아버지야!"
하고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돋보기를 쓰고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되도록 동화를 쓰리라 믿었더니, 머리가 희기도 전에 가 버린 소천의 영전에 놓인 <호박꽃 초롱>이 내 것보다 훨씬 새 책이었다.
1941년에 나온 강소천 동요 시집 <호박꽃 초롱>은 내 교과서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소천을 스승으로 여겨 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호박꽃 초롱>은 여섯쪽이 떨어져 나간 헌 책이다. 1951년, 서울 재탈환 이듬해엔가 선생을 알게 되었다. 월남한 분이 이 책을 가지고 있을 성싶지 않아, 자랑 겸 허실수로 물어보았다.
"남한에 왔더니 누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내게 주었어요. 그런데, 책이 몹시 헐었어요. 당신이 가진 것이 새책이거든....."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알아챘다. 소천이 깨끗한 책을 간수하고 싶어서 바꾸자는 눈치였다.
이 때 소천은, 마치 세사 장난하는 어린이였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집 다구"
하고 중얼거리듯, 무척 순진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서너 달 전에 서울 글짓기회 연구회에 강사로 불려 나갔다. 소천 선생이 강의를 막 끝내고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초췌해 보였다.
적이나 하면 먼저 돌아갈 법한데, 끝까지 앉아 있었다. 사회자의 "... 특히 몸이 편찮으신 데도 나오셔서 좋은 말씀을 들려 주신 강소천 선생께 감사한다."는 말을 듣고, 몸이 아픈 줄 알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오는데, 어깨가 축처지고 걸음걸이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차라도 한 잔 하시자고 권했더니,
"바로 집으로 들어가야겠어."
하고 인사도 받지 않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가 버렸다. 섭섭하리만큼 매정스러웠다.
여느 때 같으면 그냥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글짓기 이야기를 또 꺼내고 기염을 토했을 텐데....
나와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는 , 숨을 거두기 27분전이었다.
이태 전에 위암을 수술받고, 경과가 좋아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얼굴이 퍽 좋아 보였다. 그 때 집도한 장기려 박사에게 고마운 분이라고 입에 침이 없이 치하했다.
"간이 조금 나쁘다고 약을 가르쳐 줬어. 이젠 살았어."
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퇴원하고는, 좀 쉴 줄 알았더니,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작품을 써 내고 방송국이다, 학교다, 정말 동분서주했다.
작품을 보거나, 방송을 들을 적마다
"이 분이 몸을 너무 부리는 군."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더니, 방송에도 안나오고, 작품도 그닥 보이지 않았다.
"위암이 재발했나?"
하고 궁금해 하던 차에 만나게 되었다. 건강이 어떠시냐고 물었다.
"일전에 뢴트겐 찍어 보았는데, 위는 깨끗하대."
하며, 아동 문학 이야기를 꺼냈다. 날이 어둔 뒤에 다방을 나와 저녁을 사주겠대서 충무로까지 갔다.
소천은 그날 책을 많이 샀다. 소천은 책을 많이 읽는다. 그의 서재를 보고 놀랐다.
내 노래에 <꽃밭에서>라는 게 있다. 피난 중에 대구에서 내던 <소년세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노래에 서로 모르던 사이인 권길상씨가 곡을 붙였다. 곡이 좋아서 한동안 불렀다. 이름없는 내 노래가 어린이들의 입에 오르니 적이 기뻤다.
소천은 처음 보는 나에게
"<꽃밭에서>가 많이 불리더군요. 그렇지만 2절은 동심이 아냐. 2절을 고쳤으면 좋을 것 같애."
라고 맞대 놓고 타박을 했다.
부끄럽고 고마왔다. 사람들은 대개 뒤에서 흉보기가 일쑤인데 맞대 놓고 일러 주니 얼마나 솔직한가. 그런거 하면, 내 노래 중의 <이른 봄>이 좋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칭찬하기란 흉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소천은 타박만 하는 게 아니라 칭찬할 줄도 아는 분이었다.
나는 첫 동요집 <봄이 오는 소리>를 엮으면서, <꽃밭에서> 2절을 고쳐 볼까하다가 뜻대로 안되어 빼고 말았다.
<새벗>에 동시 <꽃다발>을 실은 적 일이다. 다달이 한 사람의 동시를 너덧편씩 한 몫에 실었다. 하루는 소천이,
"다음엔 당신 차례니 작품을 보내시오."
하기에, 내깐엔 꼭 발표하고 싶었던 고아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일편의 동시를 보였다. 한 번 죽 훑어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왜 이렇게 슬픈 걸 쓰우."
하고, 책상서랍에 넣어 버렸다. 그 달엔 다른 분의 것이 실렸다. 소천은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엄격했다.
소천은 꽤 자상한 분이다. 내가 어린이 시간에 '동시감상'을 작가별로 한동안 방송한 일이 있다. 소천 편이 방송이 끝나자 전화가 왔다. 소천이었다. 내 방송을 녹음해 놓았다는 것이다.
동요 <닭> 외에 네 편을 골랐는데, 고향과 어머니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9월>이라는 동시는 이북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한 것이었다. 나는 이걸 읽고 해설하면서, 내가 소천이 되어 버려 목이 메었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소천이
"우리 집에 놀러 갑시다."
하고 앞장섰다. 일행이 서넛 되었었다. 소천은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곧 녹음기에 <동시 감상 강소천 편> 테잎으로 걸어 주었다. 나는 농조로,
"이 담에 내가 죽은 뒤에 내 목소리를 듣고 싶거든 강 선생 댁엘 찾아가라고 자식놈에게 일러 놓아야겠네."
했더니,
"시시한 거 지워 버리지, 하하하....."
하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소천은 술도 담배도 입에 안 댔다. 그렇지만, 술 먹는 사람하고 잘 어울리고, 술자리에선 술 먹은 사람보다도 잘 놀았다. 그러다가도 아동 문학 이야기를 꺼내서 입바른 사람의 핀잔을 받곤 했다.
작년인가 HLKA '학교방송' 10주년 기념 공개 방송에 불려 나갔다. 아나운서가 노래를 시켰다. 내 옆에 앉았던 소천은 수첩에다 뭘 부지런히 쓰고 나서,
"난 아걸 부를 테야, 가사 맞지?"
하며 내게 보였다.
내 노래 <꽃밭에서>의 첫절이었다. 그랬지만, 아나운서가 소천에게만은 당신의 노래 중에서 부르라고 해서, <태극기>를 불렀던 것 같다.
그 뒤에 내가 책 한 권을 엮게 되어 소천께 글을 부탁했더니, 써 가지고 나왔다.
"쓰기만 하고 읽어 보지 못했어."
하며 돋보기를 꺼내 썼다.
나는 "아니, 돋보기를?"
하고 놀라는 체했더니,
"왜, 나도 인젠 할아버지야!"
하고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돋보기를 쓰고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되도록 동화를 쓰리라 믿었더니, 머리가 희기도 전에 가 버린 소천의 영전에 놓인 <호박꽃 초롱>이 내 것보다 훨씬 새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