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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공부방

동심을 지킨 선생님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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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석구 작성일 13-03-3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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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석중 ( )    날짜 : 07-01-17 14:40    조회 : 2142     
 
 
 
1. 남의 땅, 폭격기 속에서의 우정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 나는 서울에 있었다. 작년 스승의 날, 57년만에 '명예 졸업장'을 내가 다니던 양정학교(그때는 양정고보)에서 타왔는데, 1929년 광주학생사건 때 학교를 뛰쳐 나온 뒤, 기자생활 10년만에, 나 다니던 신문사 사장의 장학금을 타내어 일본 유학의 길을 처자 거느리고 떠났던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던 일본군이 하와이의 진주만 기습으로, 선전포고 없는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식구를 한국으로 피난 시킨 뒤 혼자 남아 있었는데, 북해도 탄광으로 보낼 작정인 징용장이 나왔다.
일본을 탈출하려고 그 당시 신태양사(일본에서 손꼽히던 대출판사인 모던닛뽕사였는네 '모던'이 적성어라 '모던'을 신으로, 닛뽕을 일본으로 고쳐 불렀는데, 이 출판사의 사장이 바로 동화작가 마해송이었다)를 찾아갔었다.
마해송은 비록 일본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일본 문인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소파 방정환이 32세로 1931년 세상을 떠난 뒤 뒤를 이어 내가 맡아하던 《어린이》잡지에 〈토끼와 원숭이〉라는 장편동화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8·15해방이 된 다음에야, 토끼는 한국사람, 원숭이는 일본사람임이 드러났고, 마침내 토끼나라가 원숭이 나라를 쳐 무찌른 항일동화임을 알게 되었으며, 친일파로 보이던 그의 본마음엔 내 나라 어린이 사랑이 불붙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징용장을 받고 갑자기 일본땅을 뜨게 되어 작별인사를 하러 간 나를 붙잡고 그는 반색을 하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윤! 마침 잘 됐소. 전쟁이 날로 번지는데 동경이 언제 쑥밭이 될는지 모르니 우리 식구 좀 데려다 주시오. 서울까지."
나는 선뜻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아내 박외선(무용가·전 이화여대 교수)와 한 살짜리 주해, 세 살짜리 종훈, 다섯 살짜리 종기(시인·미국 이민)를 줄줄이 거느린 위장가족이 무사히 서울에 닿았는데, 우리 일행에게 일등표를 사주어서 기차에서나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서나 일본경찰의 감시의 눈을 유유히 피할 수가 있었다. 이래서 동화작가와 동요작가는 남의 땅 푝격 속에서 '상부상조'의 우정을 발휘했던 것이다.
 
2. 학비 없어 학업 포기한 목월 박영종
 
1940년, 처자 거느린 늙은 대학생인 내가 독일 신부들이 해 나가는 쏘피아 대학에 다니면서, 교실에서 부지런히 노우트에 적고 있는 것은 강의 내용이 아니라 머리에 떠오른 것은 동요였다. 학교 뜰에 성당이 있고, 교수 신부의 숙소가 있는 이 학교를 드나들면서 지은 동요에 성녀 작은 데레사에세 바치는 〈연잎〉이 있었다.
 
비가
연잎을 적시려고
애를 쓰지요
연잎은 연잎은 젖지 않고
구슬을 만들어
대굴대굴 굴리지요
 
종전 전에 일본에서 박아 나라 안팎에 돌린 나의 네 번째 동요집 《어깨동무》에 들어있는 이 한 편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를 스스로 다스리는 좌우명이 되어 주었다. 그 무렵에 세든 집에 불쑥 나타난 것은 경상도 건천 사는 동요시인 박영종이었는데 10년만에 학창으로 돌아온 내가 어지간히 부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다니던 직장(금융조합. 그는 주판도 잘 놓았고 탁구선수이기도 했다)을 집어치우고 일본 유학을 하려고 미리 둘러 보려고 온 것인데, 큼직한 이층 방을 비워 놓았었건만, 일거무소식으로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고학은 엄두를 못내고, 학비 끌어 댈 방도가 막연해서 포기한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였다.
"내가 시를 쓰고 있음을 윤선생에게 알리지 말아다오."
박영종이 동경에 나타나서 그의 친구에게 부탁한 말이었는데 내가 알았다간 야단 맞는다는 것이었다. 박영종은 내가 일본 유학을 떠난 뒤, 박목월이란 필명으로, 이태준 주간의 《문장》지에 지용의 손을 거쳐 추천시인이 되었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박두진·조지훈도 《문장》의 추천을 받았었다.
"동요 한 수 동화 한 편 못 쓰는 작가가 무슨 시인이요, 무슨 소설가겠소." 내가 숭이동(지금의 명륜동) 살 때, 오다가다 들른 길 건너 숭삼동에 사시던 춘원 이광수가 하신 말이었다. 동요를 쓰다가 어른 시로 들어선 시인에 박영종인 박목월 말고도 또 한 사람 있었다. 북간도 태생의 윤동주이다. 그는 윤동주란 필명으로 많은 동요를 지어 《카톨릭 소년》에 내고 있었다. 내가 늦동이 대학생이 되어 학교를 다닐 때 동경 '간다' 우리 YMCA 기숙사에 묵고 있던 그를 그의 삼촌인 윤영춘 씨가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켜 준 것은 8·15 해방 2년 전이었는데, 그는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나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 이 세 권을 항상 책상머리에 두고서 부지런히 시를 지었다는데, 나를 한 번 만나보기가 소원이었음을 언젠가 그의 아우 윤일주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뜻밖에도 전쟁이 한창인 무렵에 일본땅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3. 그 해 그 날 해방의 감격을 동시에 담고
 
서울에서 해방을 만난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국민복 차림으로 경기도 시흥으로, 충청도 서산으로 떠돌다가, 서울 폭격이 임박한 듯 싶어서 식구(아내와 사 남매)들을 금강산 장안사 산 속으로 깊숙이 소개(피난) 시키고 나서 나 혼자 서울에 올라온 지 한 달만에 해방을 만났는데, 그 해 그 달 그날의 감격을 동시에 이렇게 담았었다.
 
해방의 날
서울 장안에
태극기가 물결쳤다.
옥에 갇혔던 이들이
인력거로 트럭으로 풀려 나올 제
종로 인경은 목이 메어
울지를 못하였다.
아이들은
설에 입을 때때옷을 꺼내 입고
어른들은
나무나 보고 인사를 하였다.
서울 장안을 뒤덮은
태극기, 우리 기.
소경들이 구경을 나왔다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느닷없이 38선이 그어져 나라땅이 두 동강이 나면서 글쓰는 이들의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순수문학을 앞장서서 지키던 이태준, 박태원, 안회남, 허준들이 남쪽에서 사라졌고, 윤복진, 신고송, 현덕 같은 이들이 동요와 동화와 동극을 쓰던 붓대를 멈추고 북으로 달려갔다. 그런가하면, 박화목, 강소천, 박경종, 장수철, 모기윤 이런 분들은 북에서 남으로 넘어와서 새로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섣달에 친구들과 출판사를 차린 한편 '아협(조선아동문화협의회를 줄인 말)'에서 《주간 소학생》(나중에 월간 《소학생》이 됨)을 내면서 모집한 어른이 쓴 동요에 뽑힌 월남 아동문학가 박화목(본 이름 은종)의 그 당시 동시 한 편을 보자.
 
솔밭길 산비탈 길
사십 리 길은
초생달 기울어진
으스름 밤길.
내 나라 내 땅 안에
내가 걷는데
무엇이 무서워서
밤을 새워 걷나요.
서러운 국경
들에 참새들도
하늘의 아기별도
잠들었는데
산 고갤 살금살금
기어 넘고요
풀숲 새 몰래몰래
걸었습니다.
 
 아동문학가요 시인인 박화목 또한 슬픈 이산가족이었던 것이다.
 내가 우리말 〈졸업식 노래〉(해방 전엔 어디서나 일본말 노래였다)를 지어 주고, 우리 몇이서 부활시킨 어린이 날 부를 노래를 지어준 것은 해방 이듬해였는데, 곡을 붙여준 작곡가 안기영이 월북을 해 버리니 모처럼 된 곡을 못 부르게 되어 막막한 판에 〈반달〉을 작사 작곡한 윤극영이 북간도에서 해방과 더불어 잡혀 들어가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감옥에서 제자 간수가 몰래 빼내주어 가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구사일생으로 서울에 닿자 손을 댄 첫 작곡이 〈어린이날 노래〉였다.
 
4. 6·25와 월북 작가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평양의 조만식 선생과 서울의 남로당원 김삼룡과 개성에서 맞바꾸자는 이야기가 한창이던 판에, 느닷없이 쳐내려 온 것이 6·25 공산군 남침이었는데, 이 통에 시인 김기림과 정지용과 김동화, 그리고 평론가 박영희, 소설가 이광수, 사학가 정인보는 붙들려 갔고, 제 발로 걸어간 월북작가들의 작품은 그 뒤 우리 앞에 나타나지를 못했다.
파주 산골에 식구들과 숨어 지내던 나는 1·4후퇴 뒤에 대전까지 걸어서 내려갔는데, 충청도 진잠이라는 데로 피난 가 있던 식구들과 몇 밤 같이 지낸 뒤 세상일이 궁금해서 대전으로 나와 친척집 신세를 지고 있었다. 하루는 대전일보 전쟁판에 정훈파견대 소식이 났는데 기획부장에 강용율이라는 이름이 눈에 띠었다. 강용율! 그는 아동문학가가 아니던가. 1932년 무렵에 《아이생활》(《새벗》잡지 전신) 독자 작품란에 내 손을 거쳐 뽑힌 적이 있는 그가 아닌가. 강용율이 강소천임은 아는 이는 드물었다.
나는 신문을 들고 정훈파견대가 묵고 있는 한국은행 대전지점을 찾아갔다. 파견대장은 김기웅(전 건국대학 교수·현재 문화재 위원) 대위였는데, 알고보니 그는 강소천과 함흥 영생고보 동창생으로 미군의 흥남 철수 작전 때 갑자기 배에 실려 남하한 통에, 가족들하고도 생이별을 하고 허름한 옷 그대로 배에 실려 부산으로 온 것이었다. 잡혀가서 문초를 당하고 있는 것은 문교부(그때 장관 백낙준 박사)비서실 일을 보던 박창해(전 연세대 교수·미국 이민)가 다리를 놓아서 중학 동창인 강소천을 구출해 내어 문교부 편수국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어책을 새로 엮고 있을 때 그를 데려다가 편찬 일을 돕게 했고, 김기운 대위가 거느리고 잇는 정훈대로 자리를 옮겨 대전에서 군대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십여 년만에 만났지만 서로 대번 알아 볼 수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그는 잠자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조그만 괴나리 봇짐을 내다가 내 앞에서 풀어보였는데, 꾀죄죄 때묻은 몇 권의 공책에는 동화며 동시가 가득 적혀 있었다. 얼떨김에 가족은 버리고 왔지만, 그의 작품 초고만은 결사적으로 몸에 지니고 온 것이었다. 자기 작품을 생명처럼 여기어 전쟁터에서 전쟁터로 옮아 오면서도 끝끝내 간직한 그를 만나니, 38선이 나라 땅은 두 동강이 내놓았지만, 작품으로 이어진 우정은 갈라놓지 못했다.
8·15해방 덕에 남으로 내려온 〈반달 〉작가를 만나 나라땅을 반만 차지한 것을 반달에 비하면서 "언제 가야 우리 땅이 보름달 구실을 할는지요?" 했더니, 말문이 막혀 하시더니, 무슨 반달이 4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그냥 그대로 반달인 채 남아있단 말인가!
 
5. 38선 이남과 이북, 얻은 것과 잃은 것
 
8·15 해방이 되면서 나타난 동요시인 가운데 충주의 권태응과 함흥 대생의 한인현 작품은 내가 꾸미고 있던 《소학생》잡지에 거듭 났었는데, 일제 때 일본 와세다 대학에 다니다가 윤동주처럼 사상범으로 몰려 징역을 살다 나온 뒤 폐를 앓아 자기 고향집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 권태응 시인의 작품을 모아 《감자꽃》이라 이름 지어 책으로 폈는데 그의 〈감자꽃〉동요는 이렇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아무리 내선일체를 뇌까리더라도 일인은 일인이요 한인은 한인임을 8·15 전에 이미 노래를 빌어 일깨워 준 동요였다. 한인현의 대표작은 해방 뒤에 낸 그의 동요집 《민들레》에 실린 〈섬집 아기〉이다.
8·15 해방과 6·25 전쟁 사이에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몰려가고,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도망온 아동문학 하는 이들의 서로 다른 점은, 월북파는 '잃은 것은 동심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였는데, 월남파는 "잃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얻은 것은 동심'이었다. 그래서인지 현덕, 이태준, 박태원, 정인택 같은 분은 북에서 아동문학에 손을 대지 못했고, 강소천, 박경종, 장수철, 박화목 같은 분은 남으로 내려와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게 되었다. (몇해 전 하와이에 들렀을 때, 그곳 대학 도서관에서 이북 《아동문학》잡지를 뒤져 보았으나 월북 아동문학가의 작품은 한두 편 눈에 뜨일 따름이었다).▣
 
(이 글은 《동서문학/1988》에 실린 글입니다)